2021 <벽사 정용진 안무가>와 단독 인터뷰

댄스TV 승인 2021.11.05 20:19 | 최종 수정 2021.11.05 20:24 의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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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 정용진 안무가
아르코_대학로예술극장, 11월 10(수) 8:00PM 공연


[댄스TV=김아라 기자] 기고문 & 인터뷰

Q: 무용을 시작하게 된 동기 및 무용인생

1977년, 당시 국립무용단의 수석무용수로 활약하던 父)정재만과 母)박순자의 장남으로 서울 중구 묵정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무용학원을 통해 자연스럽게 한국무용을 접하게 되었고, 수많은 아버지의 공연을 보면서 무대가 낯설지 않았다. 명절이면 아버지과 함께 故)한영숙 선생님 댁을 방문하여 인사를 드렸고, 선생님께서는 마치 친손자처럼 대해 주셨다. 그때는 어렸기 때문에 그냥 할머니라 생각하고 따랐었다. 그러다가 서툴게 무용동작을 흉내내면 할머니께서는 웃으시며 아버지께 “저놈도 무용할라나 보다.”라며 말씀하시곤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때까지 무용이란 항상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생활의 일부였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오면서(대명中) 갑자기 대금이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그길로 故)김응서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고, 그때부터 정악대금을 시작하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 프랑스<마르띠크>에서 세계 민속무용페스티벌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숙명여자대학교에서 교수직을 하시던 아버님의 단체가 한국 대표로 초청을 받아 참가하게 되었다. 숙대학생들과 남무단(남자무용수로 이루어진 무용단)이 함께 작품을 만들어 프랑스로 가게 되었다. 그때 아버지가 유럽에 가보지 못한 나를 그냥 관광 삼아 같이 가자고 설득하여 처음으로 유럽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친한 형, 누나들과 같이 간다는 생각에 단지 신나고 들뜬 기분이었다. 프랑스에 도착하여 보름간을 쫓아다녔다. 거리공연, 퍼레이드, 무대공연, 파티 등 모든 것이 어린 나에겐 너무나도 새롭고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와 환호가 한국무용의 가치를 확인시켜주었고, 그 안에서 나도 모르게 복받치는 희열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한 마음을 아셨는지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호돌이 의상을 입고 퍼레이드 맨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88 서울 올림픽 이 끝난 직후라 세계인들도 호돌이를 쉽게 알아보았다. 맨 앞에 서서 30명의 무용 단원들을 이끌고 유럽의 아름다운 해양도시를, 그것도 외국인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걸어간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설레고 짜릿하기만 했다. 그러한 감동을 품에 안고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무용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그냥 한번 해보라고 하셨다. 그 후부터 아버지를 따라 1주일에 5번씩 매일 새벽에 무용연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기본동작을 익히자 아버지는 곧바로 <승무>를 가르쳐 주셨다. 느리고 긴, 지루하기도 하고 힘들었다. 형들이 공연하던 박진감 있는 춤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승무가 최고의 춤이고, 나중에 진정한 매력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나의 무용 인생은 승무와 함께 시작되었다.

인문계 중학교를 마칠 즈음 부모님의 권유로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때는 대금도 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악·가·무 일체란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국악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궁중무용, 국악, 민요, 판소리, 단소 등 그동안 내가 접해보지 못 한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단체생활을 통해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예를 알게 되었다. 국악고등학교에서의 3년이 “내 무용인생의 황금기” 였고 춤의 기반을 다지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대학진학의 실패로 결국 서울예술 전문대를 지원하게 되었고, 그것은 또 하나의 나를 완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정형화된 틀 속에서 전통의 미를 찾아왔다면, 이번에는 자유분방함 속에서 다양한 끼와 재능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이 기간동안 <내림춤판>이라는 큰 공연을 통해 4대 벽사라는 타이틀을 얻기도 하였고, 신인콩클에서 내가 직접 안무한 창작무용<길>이란 작품을 통해 특상을 수여하게 되면서 군면제의 혜택도 받게 되었다. 독특한 아이디어와 기발한 창작활동으로 짧지만 길었던 2년의 세월을 그렇게 보냈다.

그러나 그 당시 전문대의 특성상 학위가 인정되지 않아 상명대학교 3학년 편입을 선택하게 되었고, 이 시기에 한국 창작무용 그룹<MusA>를 결성하여 수많은 공연도 직접 연출·안무 하며 작품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 이후 학사 학위수여와 동시에 숙명여자대학교 전통문화 예술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전통무용의 진정한 멋과 독특한 호흡을 더욱 자세히 배울 수 있었다. 그러기에 더욱 승무에 매진하였고, 그 결과 2003년 6월29일 [제5회 전국 전통무용경연대회]에서 승무로<대통령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예전에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던 승무의 매력을 맛보고 난 후, 승무의 전승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극장이란 공간을 벗어나 야외, 마당, 기타 어느 장소에서도 춤을 추었고, 관객과 가까이하는 공연, 학생들을 위한 특별강의 등 사람들이 원하는 곳엔 언제나 함께 하려고 노력 하였다. 또한 아버지와 함께 108승무(108명이 추는 승무)를 기획하여 승무의 장엄함과 웅장함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전통무용의 소중함과 그것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나의 춤 인생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 후 문화 교류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느끼고 중국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1년여 동안 북경무용학원(중국 베이징 최고의 예술학교)에서 중국학생들과 생활하면서 여러 중국 춤을 배우고 또한 한국 춤을 가르치며 새로운 경험에 차차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에도 일본, 미국 등을 오가며...

우리의 전통무용을 전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2009년에는 세종대학교에서 무용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면서 나의 무용인생에 또 하나의 연구업적을 남기게 된다.

벽사 정용진 안무가와 인터뷰

Q: ‘한국의 춤’ 전통춤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벽사춤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벽사춤>은 故)정재만 선생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서울의 본원을 중심으로 각 지방의 지부들과 함께 벽사(碧史)류 춤을 보존하고 계승해 나가는 대표적인 한국전통무용 단체이다.

벽사(碧史)류 춤 이란, 오늘날 한국의 여러 춤들을 총 집대성한 故)한성준으로부터 전승되어지는 춤을 말하며 지금의 서울,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발달 되었다. 이후 그의 손녀인 故)한영숙에 의해 대물림되면서 한 단계 발전되었다. 벽사(碧史)란, 한영숙의 호이기도 하다. 한영숙의 제자 정재만은 선생으로부터 벽사(碧史) 라는 호를 이어받아 벽사류 춤의 계승·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며 춤의 이론 정립에도 힘써왔다. 1991년에는 벽사춤 아카데미를 창설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매년 동·하계 수련회를 개최해 춤의 전파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또한 전통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작품 활동을 통해 우리춤의 대중화에도 앞장섰으며, 국내뿐만이 아닌 정기적인 해외공연을 통해 벽사춤을 세계에 알리면서 우리춤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시켰다. 2010년에는 20여 년 간 이끌어오던 (사)벽사춤 아카데미에서 <벽사춤>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2014년 갑작스러운 타계 이후 지금은 그의 아들 4대 벽사 정용진에 의해 그 맥을 이어 가고 있다. 그는 벽사 춤의 계승자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벽사 정재만류의 정립과 올바른 전승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 시대에 맞는 다양한 공연 활동으로 전통과 창작의 조화를 잘 이루어내고 있다.

Q: 우리춤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사실 우리춤, 특히 전통춤의 대중화는 어려운 난제이다. 90년대에는 우리춤의 대중화를 위해 무던히도 노력을 했었다. 우리춤의 창작화, 타장르와의 협연, 찾아가는 공연등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 당시에는 온라인 영상의 활용도가 높지 않은 때라서 직접 춤을 보여줘야 하는 시기였다. 무대, 조명, 음악, 의상, 분장 등 여러 요소들이 제대로 갖춰져야 우리 춤은 더욱 돋보이게 되고 보다 퀄리티 있는 공연들을 대중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공연제작비가 필요하고, 그 모든 것을 감당하면서 대중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다고 아무 곳이나 찾아가서 춤을 보여 준다는 것은 오히려 우리춤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일반 관객들의 호응도 못 받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 방향성을 가지고 우리춤을 지켜나가려한다. 첫 번째는 우리춤의 고급화이다. 제대로 갖춰진 환경에서 더욱 세련되고 품격있는 작품들로 마니아층을 구축하는 것이다. 공연을 본 관객들은 마치 분위기 좋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온 것 같은 만족감을 얻게 될 것이다. 두 번째로는 우리춤의 콘텐츠화를 통한 대중들과의 소통이다. 요즘 유행하는 유투브나 SNS를 통해 우리 춤을 홍보하는 것이다. 우리 춤의 멋스럽고 아름다움을 영상으로 제작하여 전세계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대중화에 앞장설 것이다. 예전에 생각했던 대중화는 시대의 급속한 변화에 따라 그 방향도 달라져야 한다. 우리의 전통춤이 국가 브랜드로 세계속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더욱 정진하겠다.

Q: 승무, 산조춤(월하정인), 훈령무, 살풀이춤, 광대무, 큰태평무 작품설명 부탁드립니다.

1 승무

-국가 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된 승무는 한국춤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한국 춤사위를 총 집대성 해놓은 춤으로 질량의 확대가 크며 공간 구성미가 돋보인다. 또한 중용(中庸)의 법칙을 바탕으로 인간 내면 철학의 경지로 승화되었다. 벽사류 승무는 한성준-한영숙-정재만으로 전해지며, 기원의 성격을 띤 제의의 춤으로 天, 地, 人 삼재(三才)사상이 내제된 담백하고 우아하며 정제된 고품격의 춤이다. 벽사류 춤의 사군자중 대나무(竹)에 비유된다.

2 산조춤(월하정인)

-2007년 이전에는 <산조춤>이라는 작품명으로 벽사춤 아카데미, 숙명여자대학교, 전통문화예술대학원, 삼성무용단, 한국의집무용단, 벽사 수련회 등에서 전수해 오다가 2007년 09월 30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정재만 전통춤 보존회 제1회 정기공연 <古今想思(고금상사)>이 공연되었고, 그때 정재만류 <산조춤>이 처음으로 '청풍명월'이라는 이름으로 선보이게 되었다. 현재는 벽사춤 보존회에서 독무와 군무로 전승되고 있으며, 2019년에는 그의 아들 4대 벽사 정용진이 한갑득류 거문고 산조에 맞춘 9분30초 분량의 <월하정인>으로 재구성하였다. 원본의 기본 틀 안에서 같은 장단의 형식에 추어지기는 하나 독특한 거문고 연주 기법과 부채 춤사위의 조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또 다른 멋을 자아내고 있다.

3 훈령무

-조선조 말 한성준이 구군의 훈련장면을 보고 무용화한 작품이다. 한영숙 선생의 고증을 받아 이후 1983년 정재만이 독무로 재현하였으며, 1987년 정재만 남무단에 의해 군무화 되면서 널리 알려진 활기차고 박진감 넘치는 작품이다.

4 살풀이춤

-살풀이장단에 춤을 붙여 춤추는 이의 심적 고저 또는 내면의 세계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고도의 기교가 요구되는 춤이다. 즉흥무 또는 수건춤 이라고도 불려지나 1935년 부민관에서 초연되면서 한성준에 의해 살풀이춤으로 명칭이 고정되었다고 한다. 이 춤은 인간의 한과 비애를 풀어 슬픔을 기쁨으로 승화시킨다. 또한 내면의 이중적 구조를 지닌 예술성이 높은 춤으로 정·중·동과 절제미의 극치를 이루는 춤이다. 벽사류 춤의 사군자중 국화(菊)에 비유된다.

5 광대무

-광대무는 한성준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그 형태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패랭이에 깃털을 꽂고 춤추는 한성준의 사진을 보고 그의 손녀인 한영숙의 고증을 받아 정재만이 재안무해 남성 독무로 추었다. 무용극 <놀당갑서>에서 정재만에 의해 초연되었으며, 지금은 그의 아들 정용진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줄타기를 하던 광대가 줄에서 내려와 부채를 들고 추는 춤으로 역동적이고 힘 있는 춤사위가 주를 이룬다.

6 큰태평무

-태평무는 1900년대 한국 근대춤의 대가인 한성준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나라와 백성의 태평성대를 바라는 왕과 왕비의 마음을 담은 춤이다. 지신(地神)에게 마음을 다해 기원하는 의미로 발디딤이 섬세하고 활동적이다. 이 춤은 그의 손녀인 한영숙에게 전해졌으며, 그녀의 제자인 정재만에 의해 계승·발전되었다. 한영숙의 태평무는 본래 붉은 원삼 속에 당의를 입고 양손에는 한삼을 끼고 추어지다가 이후에는 당의만 입고 추는 춤으로 간결하게 바뀌었다. 그러나 정재만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고, 나아가 군무화 되면서 큰태평무라 명칭을 정하였다. 벽사류 춤의 사군자 중 난(蘭)에 비유된다.

Q: 공연 활동에 있어 어려운 점이 있다면?

올해로 무용인생 30년이 되었다. 그동안 수많은 공연 무대에 서 왔고 때로는 제작·연출까지 맡으면서 다양한 경험들을 했다. 공연 활동을 해오면서 어려운 점이라면 아무래도 제작비 문제가 크다. 국립, 도립, 시립 등 기관에 속한 단체가 아닌 개인으로 일을 진행하기엔 쉽지 않은 작업이다. 자비로 선 투자를 하고 관객 티켓 수익으로 충당해가는 그러한 일들이 대부분이고 거의 적자를 본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지원금제도가 있긴 하지만 하늘의 별 따기이고 그 액수도 그리 크지 않아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도 기업들의 적극적인 문화사업 투자를 통해 예술가들이 제작비 걱정 안하고 좋은 작품 제작에 몰두 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Q: 공연준비과정 중 에피소드!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장면이 있었다. 출연 인원이 40명이 넘는 대규모 공연인데 우리 연습실이 협소하여 공간적인 제약을 많이 받았다. 그 이유는 코로나로 인해 체육시설이나 문화복합 시설들의 넓은 공간 대여가 불가했기 때문이다. 코로나 전까지는 넓은 시설에서 자유롭게 연습을 진행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못함이 참으로 아쉬웠다. 그리고 코로나 양성자 밀접접촉이 늘어나면서 연습 중 격리에 들어가 연습에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들도 발생하는 등 코로나 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상황들이 발생하였다.

​Q: 제 2의 인생이 주어진다면? 꼭 해보고 싶은 것은?

세계 각국의 민족 춤들을 배워보고 싶다. 몇몇 춤들은 배워 봤지만 보다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민족의 춤들을 경험해 보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어디에 속하지 않은 자유로운 춤꾼이 되고 싶다. 그러나 이번 생은 우리 벽사류 춤의 맥을 잇고 계승·발전 시켜야 하는 사명감으로 정진할 것이다.

Q: 코로나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지원 대책 요청이있다면?

사상 초유의 전세계 집단 감염으로 모든 삶이 힘들었던 시간들이 벌써 2년이 다 되어간다.모든 시장경제가 마비되었듯 공연계도 작년에 이어 코로나 여파로 얼어붙었고 대부분의 공연이 무관중 온라인 영상으로 대체되었다. 우리 예술가들은 공연으로 금전적 이득을 취하기는 쉽지 않다. 전 국민을 위한 재난지원금도 턱없이 부족하고 코로나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너무나도 크다. 개인적인 견해는 지금 이 시점에는 자잘한 추가 국민 재난 지원금보다는 빠른 백신수급과 치료제 개발 및 확보에 총력을 기울여 하루 빨리 코로나를 종식 시키는 것이 답이라 생각된다. 예술계에 지원되는 여러 행정 지원도 있기는 하지만 하루 빨리 문제의 근본을 잡는 것이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Q: 공연 기대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픈 말

감사합니다. 이번 공연은 벽사춤의 대표적인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통과 정통을 바탕으로 우리춤의 진수를 보여줄 것이며, 벽사의 이수자, 전수자들이 한마음으로 무대를 빛내줄 것입니다. 벽사의 제자들은 그 계보를 명확히 이어갈 것이며, 스승에 대한 예의를 마음에 새기고 벽사춤의 발전을 위해 더욱 노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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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 정용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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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이수자
정용진 안무가


정용진 안무가소개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이수자
벽사춤 대표 / 벽사 정재만 춤 보존회 회장
사) 대한민국 전통예술 전승원 이사
한국융합과학회 이사
세종대 무용학 박사

<상 벌>

97 한국무용협회 신인콩쿨 <특상>수상
00 전국재인춤 경연대회 <문화부장관상>수상
01 전국 우리춤경연대회 <문화부장관상>수상
03 제5회 중요무형문화재 종목 전통무용 경연대회 <대통령상>수상
08 (사)우리춤협회주최 우리춤대축제 <우수작품상>수상
09 대한민국 전통연희축제 Mr.춘향 <대상> 수상

<강의 경력>

전- 국립국악고 강사, 안양예고 강사, 덕원예고 특강, 브니엘예고 특강
상명대학교 강사, 숙명여자대학교 강사, 세종대학교 강사, 경희대학교 강사
한양대학교 강사, 성균관대학교 강사, 서울예술대학교 강사, 서울종합예술학교 특강
한국예술종합대학교 연극원 강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원 강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실기과 강사, 우석대학교 특강
명지대학교 사회교육원 강사, 숙명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강사
세종대학교 공연예술대학원 강사, 숙명여자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강사
중요무형문화재 학점은행제 강사, 국립문화학교 강사, 명지대학교 선교무용학과 강사

현- 서울예술대학 외래교수, 숙명여자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전통예술과 겸임교수

[출처/댄스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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