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TV=이주영 무용평론가] 역사만큼 깊은 춤미학을 보여준 한국현대춤협회(회장 문영철)의 <제38회 한국현대춤작가 12인전(이하 작가전)>이 7월 9일부터 16일까지 나루아트센터 대공연장에서 열렸다. 1987년 시작된 작가전은 일 년 열두 달의 의미처럼 ‘12인전’의 전통과 역사가 한국 현대춤사(史)를 유유히 흐른다. 그룹별로 평하고자 한다.

권세현 안무 'Silent nosie'ⓒ손관중

김성훈, 권세현, 문지애, 강지혜(7월 9~10일)

조명과 움직임의 컨택이 시선을 끈다. Akram Kan 단원을 역임한 김성훈(김성훈댄스프로젝트 대표)은 통과와 탈락을 경계 짓는 ‘검수(檢收)’를 통해 존재의 본질을 몸짓으로 구현했다. 작품 <검수>는 규격에 재단 당하는 ‘검수받는 존재’에 대해 위로와 성찰, 도전과 응시를 동시에 보냈다. 타자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기준을 웅변한다. 조명의 음영(陰影) 처리, 느림과 빠름의 움직임 완급 조절, 그 속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질주 속 고독’은 이 작품의 힘이다. 나(我)를 말하지만, 우리와 사회까지 아우르는 철학적 사유는 몸의 투쟁을 넘어 세상에 대해 묵직한 포효(咆哮)로 다가왔다.

김성훈 안무 '검수'ⓒ손관중

네덜란드·노르웨이·폴란드 국립발레단, 유니버설발레단 단원을 역임한 권세현(무브먼트 momm 대표·와이즈발레단 발레 마스터)이 침묵 속 감정의 변주를 춤으로 담아낸다. 권세현, Aleksandr Seytkaliev의 2인무 <Silent nosie>는 ‘조용한 소음’이라는 일차적 의미를 치환해 ‘숭고한 침묵’을 말한다. 안정과 치유를 향한 연인들의 목소리가 ‘소통’이란 기제를 통해 감정과 존재를 직조시킨다. 인식의 차원으로 승화된다. 철학의 존재론과 인식론이 수렴된 구조다. 공연이 시작되면, 아련함이 남녀 무용수를 맴돈다. 테크닉과 표현 양면에서 수월성을 보였다. 미처 말하지 못한 감정은 몸짓을 통해 어느새 고독과 그리움이란 환희의 찬사를 보내고 있다. 직설적이지 않아 더 깊다. 듀엣의 감정 교류가 독백이란 언덕을 넘어설 땐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게 만든다. 무언(無言)이 ‘춤’을 통해 유언(有言)이란 이름표를 바꿔 단 ‘권세현의 마법 감성 안무’다. 홀릭(holic) 되기에 충분하다.

권세현 안무 'Silent nosie'ⓒ손관중

2023년 작가전에서 관객평가단 최우수 작가로 선정된 문지애(한양대 무용학과 겸임교수·김복희무용단 대표)는 물속이라는 한계 공간에서 인간 내면을 들여다봤다. 작품 <Homo RuahⅡ - 물 숨>은 ‘물속에서의 숨’이라는 이미지가 부여하듯 평상시 숨 환경과 다른 영역을 끌어왔다. 재치있는 발상이다. 한계 속에서 찾아가는 물의 숨은 삶의 또 다른 숨을 마주케 한다. 위태로움과 도전, 욕망까지 아우른다. 공연이 시작되면, 문지애가 먼저 등장한다. 이후 안무자와 더불어 춤 역량 좋은 이지희(한양대 무용학과 겸임교수·무브포켓 프로젝트 대표)가 등장한다. 두 무용수의 조합은 안무의 퀄리티 상승과 춤 전개에 있어 탄탄한 뒷받침이 됐다. 강자와 약자 간의 밀고 당김이 주는 메시지는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처럼 거세다. 갈등의 진원지인 물은 숨이란 생명의 에센스를 끝까지 놓지 않는다. 의미 있는 사유작(思惟作)이다.

문지애 안무 'Homo RuahⅡ - 물 숨'ⓒ강선준

최지원이 상자를 쓰고 무대에 등장한다. 작품에서 중요한 변곡점 역할을 한 도미노 장면 이후, 강지혜의 등장은 유기적이다. 관을 들고 이어진 2인무는 이별의 서곡을 알린다. 삶은 바다다. 매일이 출렁인다. 두려움의 시간이기도 하다. 강지혜(강지혜댄스컴퍼니·윤미라무용단 대표)가 이별을 고(告)한다. 작품 <결론은 이별>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인생. 그 인생을 이뤄나가는 나이테 하나하나는 순간의 그림자다. 짧지만 전체 인생을 이루는 필요조건이다. 안무자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필요충분조건까지 연결되는 안무적 영민함을 보여줬다. 이별을 통해 삶을 반추케 했다. 소멸과 영원의 간극을 이별이란 키워드로 녹여냈다. 결론은 이별이다.

강지혜 안무 '결론은 이별'ⓒ손관중

윤전일, 손미정, 이혜원, 홍은주(7월 12~13일)

국립발레단 주역을 역임한 윤전일(윤전일댄스이모션 대표&안무가)은 작품에서 ‘숨’을 가져왔다. 이승아의 슬픔이 무대에 내려앉기 시작한다. 저음악에서 무음악으로의 전환은 밀도를 높이게 만든다. 윤전일, 이승아 듀엣은 과하지 않은 감정선 처리가 인상 깊다. 사랑하는 자의 마지막 숨, 그 숨소리에 영원이란 호흡을 투영하고자 한 <숨..>은 죽어가는 숨에 나의 숨을 맡긴다. 물리적 영역의 숨을 넘어 사랑이란 숨을 아로새겼다.

윤전일 안무 '숨..'ⓒ손관중

인생은 길의 연속이다. 좋은 길, 나쁜 길, 기쁜 길, 힘든 길 등 다양한 길이 놓여 있다. 예원학교 한국무용 전임교사 손미정은 세상이란 길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감사하며 가고자 다짐한다. 그 길을 작품 <Via Dolorsa – 가지 않은 길>을 통해 새롭게 길을 낸다. ‘비아 돌로사(Via Dolorsa)’는 ‘고난의 길’을 의미한다. 안무자는 솔로춤을 통해 고통의 순간에 대한 기억과 후회, 가지 않은 미완의 길에 대한 미련과 두려움 등을 ‘마음(心)’이란 그물망에 담아냈다. 한국춤이 지닌 고유성과 기호성을 움직임과 무대요소를 적극 활용해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자신의 춤 색깔로 채색한다. 음악에 몸을 맡긴 자유함은 그 길의 동행자다.

손미정 안무 'Via Dolorsa – 가지 않은 길'ⓒ최시내

나희덕 시인의 시집 <야생사과> 중 ‘안개’라는 시가 원전이 된 이혜원(서울예술고등학교 현대무용 전임)의 <나는 이미 지워졌다>는 두 번째 그룹 작품에서 깊은 인상을 준 작품이다. 시에도 나와 있듯 안개 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물상(物象)’, 그 물상에 대한 경외심으로 안무된 이 작품은 물상을 ‘춤상(舞象)’으로 그려냈다. 연극적 요소, 물동이 오브제의 활용, 사실감과 입체성 좋은 영상 등은 움직임과 안개를 걷어 내고, 춤을 드러내게 한 일등공신이다. 비움과 채움의 미학까지 돌아보게 한 컨템포러리(Contemporary)성 좋은 무대다.

이혜원 안무 '나는 이미 지워졌다'ⓒ옥상훈

온음(whole tone)의 절반에 해당하는 음정을 일컫는 ‘반음(半音)’. 청주시립무용단 예술감독 홍은주는 불완전한 삶에서 마주하는 존재의 이유를 춤으로 제시했다. <반음 – 반음을 타고 오르는 아리랑 고개>에서다. 삶의 화해를 바라보는 안무자의 시선이 ‘현재의 나’와 ‘내 속의 나'를 교차시키고, 일치되게 하는 모습을 춤으로 구현했다.

홍은주 안무 '반음 – 반음을 타고 오르는 아리랑 고개'ⓒ박상윤

이영철, 김남식, 최소빈, 김용철(7월 15~16일)

‘속삭임’이 의미하듯 이영철(국립발레단 발레 마스터)의 <Whisper>는 공연의 시작과 끝을 읊조림으로 열고 닫는다. 이영철과 장혜림의 2인무인 이번 작품은 계절 시리즈 중 겨울을 선택했다. 보이지 않지만 그 속에 흐르는 요소들을 추적한다. 솔로와 듀엣의 각 장면 속 배치, 거문고, 타악과 어우러진 춤의 변주가 시간 여행을 떠난다. 숨결을 만날 수 있다. 시적 형상화가 춤과 어울린다. 빨간 미니 무대가 준 여운은 메타포(metaphor)를 배가했다.

이영철 안무 'Whisper'ⓒ박귀섭

김남식&댄스투룹 대표이자 꽃피는 몸 프로젝트 예술감독 김남식은 멀티 안무가다. 클래시컬한 현대적 움직임과 안무는 기본이고, 장소성 강한 무대 구현, 융합 무대, 사회적 이슈를 다룬 작품 등 다양한 색채를 춤으로 구현하는데 능하다. <기둥 위의 남자 – The Man on the Pole>는 강남역 사거리의 CCTV 기둥 위에서 355일 동안 생존했던 한 남성의 서사를 춤으로 담았다. 공연이 시작되면, 단 위에서 줄넘기하는 장면이 보인다. 오랜 시간 거기에서 생존했던 루틴한 모습, 뛰기를 통한 또 다른 넘기를 염원하는 상징성도 비춰진다. 무대 우측 양동이에 물을 담아 올린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의미 있는 오브제는 바로 ‘기둥(pole)’이다. 영상 속 기둥 오르기 장면과 무대 위에서의 오버랩이 절묘하다. ‘인간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침묵의 서사적 몸짓으로 구현한 이 작품은 ‘존엄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했다. 마지막 작은 기둥 위 움직임이 주는 울림이 크다. 스산하다. 그러나 깊다. 꽁꽁 얼어붙은 몸 위에 봄바람 날리듯 인간 존재의 본연적 가치가 무대 위로 피어난다. 기둥 위의 남자다.

김남식 안무 '기둥 위의 남자 – The Man on the Pole'ⓒ손관중

꽃은 인생을 담는데 유효하다. 단국대 무용학과 교수 최소빈은 ‘장미’를 소환했다. 작품 <Rosa hybrida>에 나온 ‘Rosa hybrida’는 골든 로즈의 학명이다. 우정, 사랑, 기쁨 등이 장미 꽃송이에 담겨 있다. 한 여인이 걸어온 인생 속에는 여러 삶의 지층에 박혀 있다. 최소빈, 이명헌, 이코노스타소프 막심이 출연한 이 작품은 다양한 감정의 서사가 공존한 무대였다.

최소빈 안무 'Rosa hybrida'ⓒ손관중

작가전 피날레는 김용철 안무 <흔들리지 않게>가 장식했다. 부산·천안시립무용단 예술감독을 역임한 김용철의 안무는 색채가 확연하다. 고립된 색채가 아니라 조각보처럼 다양한 컬러를 자신의 미감으로 상승시킨다. 창작성을 고양하는 요소다. 이번 작품 타이틀에서 유추할 수 있듯 흔들림과 안정됨이란 역학적 의미보다 심리적 요소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공연이 시작되면 주술같은 음악이 쏟아진다. 흩어진 낱말이 허공을 가르듯 빠롤라(Parola)의 무경계가 일순간 몰입하게 만든다. 머리에 긴 봉을 이고서 일어나는 김용철의 고요한 중심잡기는 경계의 저울질 가득한 삶을 찬찬히 바라본다. 나와 나를 둘러싼 제반 환경은 나를 중심에 둘 것인지 아니면 타자의 시선에 기준을 둘 것인지에 따라 양상이 다르다. 작품 <흔들리지 않게>는 흔들림 속 중심을 찾아가는 지난한 여정을 그리고 있다. 무대에서 말하는 몸의 자화상은 나와 너를 동시에 비춘다. 흔들리지 않았다. 몸의 철학적 에너지를 진중하게 만난 시간이다.

김용철 안무 '흔들리지 않게'ⓒ손관중

이주영(무용평론가・고려대 문학박사・한양대 무용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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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댄스TV= 이주영(무용칼럼니스트)-이주영의 무용읽기_2025 한국현대춤작가 12인전